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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2-17 14:28:43, Hit : 9988, Vote : 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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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한국의 대학은 지금"
http://noolbyun.net/

정남영, "한국의 대학은 지금"

망가져 가고 있다. 그 교문들과 교문에서 건물들로 향하는 길목에 달아놓은 가지각색의 선전 플래카드들과 홍보 플래카드들 그리고 각종 활동의 플래카드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디어와 지하철 등에 등장하는 각종의 찬란한 대학홍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대학이 화려하게 망해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표면에 신경쓰다보니 속건강이 엉망이 된 불행한 성형미인처럼 그럴듯한 표면 아래 속이 푸석푸석하게 썩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디킨즈의 소설 󰡔리틀 도리트󰡕(Little Dorrit)에 나오는 제너럴 부인은 부잣집 자제들의 가정교사이다. 그러나 제너럴 부인이 하는 일은 학생들의 지적, 감성적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다. 제너럴 부인은 그 자신 아무런 견해가 없다. 따라서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고유한 견해를 형성하도록 돕지 못한다. 제너럴 부인의 견해란 오직 다른 사람의 견해를 마치 정해진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처럼 달리게 하는 것뿐이다. 제너럴 부인은 자신이 반박하지 못하는 것은 벽장에 가두어 놓는 식으로, 즉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식으로 처리한다. 말하자면 현실인식의 알맹이를 제거한다. 그러나 제너럴 부인의 최고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이렇게 그 내용이 제거된 대상의 표면을 광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너럴 부인이 이 반들거리는 표면 아래에서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물질적 이익, 즉 돈이다.

제너럴 부인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속하지만, 오늘날 대학은, 특히 한국의 대학은 꼭 이 제너럴 부인을 닮았다. 7, 80년대 대학가를 특징짓는 조용한 학업에의 정진과 이 정진을 방해하기 일쑤였던 현실에 대한 고민들과 현실로 향하는 가열찬 실천들 ― 이것들은 이제 벽장 속에 처박혔다. 남은 것은 반들거리는 표면과 그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자기이익에 대한 가열찬 추구이다.

실험실 하나 제대로 못 갖춘 대학이 무슨 우수대학이니 아니면 교육인적자원부 선정 ‘거시기’니 하면서 떠들어댄다. 투자 한 푼 안 하는 재단을 가진 대학이 빚을 내어 건물을 지으면 사회에서는 건물만 보고 ‘그 학교 점점 발전하네’라고 입을 모은다. (건물이 크면 공부 잘 하나?) 건물의 숫자가 증가하는 데 비해서 학생수에 비한 교수의 숫자가 줄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들은 학점과 관련된 자기이익과 취업과 관련된 자기이익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방향으로 길들여져 간다. (이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7, 80년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인상을 받을까?)  그런 과정에서 실력이라도 쌓이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상당히 많은 경우 실력을 쌓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심지어는 일부러 피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실력을 쌓아주는 교수일수록 학생들로부터 기피되는 경향도 강력하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성장이란 성장통을 수반하게 마련이고 실력의 향상이란 정신과 감성의 성장에 다름 아니라 이 역시 일정한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인데, 학생들은 마치 돈을 내고 써비스를 받으러 온 고객처럼 편안하게 좋은 학점을 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과의 관계는 마치 돈과 학점을 주고받는 관계로 간주되며, 좋은 상품(높은 학점)과 자신의 등록금의 교환이 주된 관심사이다. 사제 사이의 인간적 상호관계는 결코 장려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늘어난 잡무와 학교나 재단으로부터의 통제, 그리고 숫자의 턱없는 부족(한국의 상당수의 대학은 고등학교보다 교수 1인당 학생수가 높다)은 교수들로 하여금 학생들과의 인간적 관계에 신경을 쓰는 것과 같은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도록 장려(?)하는 조건들이다.

현재 모두가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두가 이렇게 되는 방향으로 점차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교육을 몰고 가는 가장 주된 요인은 경제의 정보화 이후로 미국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한국에까지 퍼진, 대학상업화 현상이며,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행태이다. 대학상업화란 대학이 상행위의 현장으로 전환된 것, 즉 교육이 물질적 이익을 도출하는 영역으로 포섭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어떤 집이 있는데, 부모 중 한 명이 돈을 벌어서 교육비로 40만원을 주면 나머지 부모 중 한 명이 그 중 30만원만 교육비로 쓰고 나머지는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돈을 벌어오는 ‘부모 중 한 명’이란 실제 현실에서는 등록금을 대는 학생들의 학부모이며, ‘나머지 부모 중 한 명’이란 주로 학교측 혹은 재단측 혹은 특정의 이기적인 대학인들이다. 거대한 액수의 사교육비의 존재가 증명하듯이 돈을 들일수록 좋은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는 교육 분야에서 이런 식으로 돈이 빠지면, 어쩌다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빠진다면, 결과는 뻔하다. (미국은 상업화가 극성스럽게 진행되었긴 하지만, 그래도 등록금의 비율이 대학의 재정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보다 훨씬 낮다. 한국은 몇몇 ‘유수한’ 대학들을 제외한다면 대학 재정과 등록금이 거의 일대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어는 재정 총액이 등록금 총액에 못 미치는 대학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교육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상업화이다. 연구와 관련된 상업화도 강력하게 일어난다. 이는 비유하자면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아먹는 식이다.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의 결과물은 대동강물처럼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것이 사회전체로 보아 가장 생산적인데, 몇몇 개인들이 그 결과물을 개인의 소유로 독식하고 그리하여 그 결과물이 사회 전체적으로 보급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는 이른바 베이-돌 법령의 통과 이후에 이러한 풍토가 본격화되었다. 한국은 아직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돈이 많이 도는 분야의 교수들이 교육은 뒷전이고 개인적으로 돈 버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풍조가 증가하고, 증가할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되고, 학교측은 이러저러한 멋있는 이름으로 이것을 장려한다. 이런 경우 학생들은 방치되거나, 아니면 교수의 개인적 프로젝트를 돕는 아르바이트생이 된다.

물론 현재 대학의 문제는 몇몇 부도덕하고 ‘사기꾼’ 같은 개인들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더 광범한 사회적 원인에 의한 것이기에 더 심각하다. 따라서 몇몇 개인들을 처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물론 이렇게 처리하는 것도 큰 성과이며, 몇몇 대학들처럼 목전의 과제일 수도 있다.) 대학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끌고 다니는 구호 중 하나이며 대학을 망치고 있는 당사자들이 열심히 입에 올리는 ‘대학경쟁력’이 강화되기는커녕 반대로 현저하게 약화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쓸모없이 돈을 낭비하는(= 특정 개인들의 사유재산을 불리는 데 돌려지는) 비생산적인 장소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어휘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라면 이것을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을 창출하는 능력의 약화’라고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항상 설명이 필요하기에 여기서는 괄호 안에 넣는다.)

신자유주의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문제를 야기하는가? 내 식으로 말해보자. 맑스가 늘 말했듯이 자본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사회적 생산의 관리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의 추출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 즉 자본의 증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무언가를 생산해서 팔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으로 나가는 몫을 줄여서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켜서) 이윤의 몫을 늘려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이 중 후자의 것이 비정상적으로 과도해진 형태의 논리 및 행태이다. 다시 말해서, 생산하기보다 개인의 이익 챙기기가 발달한 논리 및 행태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정책 및 법적ㆍ제도적 틀을 마련해주는 국가에 의존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비규제적 자본의 체제 즉 시장주의(고전적 자유주의) 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전지구적 운동과 이윤을 가장 잘 도와주는 국가 규제 형태이다. 한국의 교육분야에서 자본의 논리를 돕는 국가규제의 담당자는 바로 교육인적자원부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대학의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만, 그 양태가 다르고 정도가 다를 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 학습과 연구의 공동체로서의 대학이란 점점 더 자취를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고 있다. 이 상태로 간다면 선생 같은 선생과 학생 같은 학생은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교수노동자와 역시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학생고객 사이의 상업적인 관계만이 남게 될 것이다. 디킨즈의 다음 대목처럼.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래드그라인드 철학의 근본원리였다. 어느 누구도 무슨 이유로든 되얻는 것 없이 누구에게 무엇을 주어서도 안 되고 도움을 주어서도 안 되었다. 감사하는 마음이란 폐지되어야 했으며 이로부터 나오는 미덕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이 살아가는 한발한발마다 계산대 위로 주고받는 거래여야만 했다. 그리고 만일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천국에 이르지 못하면 그곳은 경제학적인 장소가 아니며 거기서 우리가 볼일은 없는 것이다. Charles Dickens, Hard Times, ed. George Ford and Sylvère Monod(New York: W. W. Norton, 1966), 219면.

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라면 하등에 쓸모가 없는 생각들을 해본다.

1) 교육 분야에서 신자유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는 교육인적자원부는 해체되거나 다른 곳에서 결정된 것을 집행하기만 하는 단순 실무기관으로 축소되는 것이 한국의 대학교육을 위해서 좋다. 그 자리를 일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을 대거 포함한 민주적인 대학교육위원회가 새로 구성되어 들어서야 한다.그 구성의 구체적인 방식은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여하튼 교육인적자원부에 결정권한이 한 점이라도 주어져서는 안된다.

2) 물론 교수들의 문제가 있다. 교수들의 정신이 건강해야 대학이 건강한 법인데,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당수의 교수들은 교육인적자원부나 마찬가지로 그 심장과 두뇌 속에 신자유주의를 내장하고 있다. ‘돈’이 많이 도는 분야일수록 그렇다. 이들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다. 학생들이 스스로 알아서 잘 판단해야 하는데, 문제는 학생들 역시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주로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주입받아서 상당 정도 신자유주의자가 되어서 들어온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 교수와 신자유주의적 학생이 짝을 이루면 제대로 된 선생과 제대로 된 학생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다. 장기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학생들이 제대로 깨달을 때까지는. 그러니 견디자.

3) 만일 이도저도 안되고 견디기 힘들면 대학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대학은 중요한 곳이지만 망가지는 것이 대세라면 몇몇 개인이 어쩔 수가 없는 법이다. 대학에서만 중요한 연구 및 학습이 이루어지란 법은 없다. 주로 인문ㆍ사회과학 분에서의 일이지만, 현재 대학 바깥에 수준 높은 학습 및 연구세미나, 강좌, 토론들을 진행하는 각종의 모임들이 있다. 이러한 곳이 활성화되어 대학에서 하지 못하고 할 생각도 없는 지적 특이성들의 생산을 담당한다면, 대학이 망가지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현대 사회는 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 사회라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를 학습과 연구의 장소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만일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대학의 서열화, 학력의 권력화, 학력평가의 권력화 등이 사라지는데 한발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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