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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구 (2003-10-02 21:25:39, Hit : 15578, Vote : 2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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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글] 존 쿳시
http://www.mfiction.or.kr/

현대영미소설
제9권 2호(2002)


                                 이 석 구


J. M. 쿳시의 소설에 나타난 공동체의 정치학: 인종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    



이 석 구


   철학자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가? 그러한 기대는 도가 지나치다. 맑스도 그 자신이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였고 그러자 다른 이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J. M. 쿳시


I. 쿳시와 자유주의 논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설가 쿳시(J. M. Coetzee, 1940-)는 1983년에 ꡔ마이클 케이의 삶과 시대ꡕ(Life & Times of Michael K)로, 1999년에는 ꡔ치욕ꡕ(Disgrace)으로 부커상(The Booker McConnell Prize)을 수상함으로써 최초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을 두 번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쿳시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내에서, 특히 흑인 비평가들이 쿳시에 대하여 보인 반응은 시원찮은 편이었다. 자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쿳시는 고디머(Nadine Gordimer)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디머에 대한 남아공의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태도에 관해서는 Todd Pitock, “Unloved Back Home”을 볼 것. 베니타 패리(Benita Parry)는 자신의 글 “Speech and Silences in the Fictions of J. M. Coetzee”에서 쿳시에 대한 남아공 비평가들의 침묵에 대하여 주목한 바 있다.
고디머가 유태계와 영국계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반면, 쿳시는 모계는 영국인이나 부계는 네덜란드 이주민의 후예 아프리카너의 혈통을 타고났다. 남아공이 배출한 세계적인 두 백인 작가들에 대하여 남아공의 비평가들이 보여주는 유보적인 태도의 근저에는 이 작가들을 따라 다니는 ‘자유주의’ 논란이 있다. 고디머는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였으나 ꡔ보호주의자ꡕ(The Conservationist, 1974)를 출판한 직후 가졌던 기자회견에서 “백인 급진주의자”임을 천명하고 자신을 더 이상 자유주의자로 부르지 말 것을 요청하였던 적이 있다. 작가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은코시(Lewis Nkosi)나 와그너(Kathrin Wagner) 그리고 음팔레레(Es'kia Mphahlele) 등 적지 않은 수의 아프리카 비평가들이 그녀의 후기 소설을 자유주의적 성향을 버리지 못한 작품으로 비판한 바 있다. 은코시의 “Crisis and Conflict in the New Literatures in English: A Keynote Address”와 와그너의 Rereading Nadine Gordimer를 참조할 것.

쿳시의 문학세계를 두고 비평가들간에 벌어진 논란은 ‘모더니즘 대(對)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슈와 맞물림으로써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쿳시를 모더니스트로 간주하는 비평가들 중 래저러스(Neil Lazarus)는, 쿳시나 고디머 그리고 브링크(André Brink) 같은 백인작가들이 보여준 기존의 정치 질서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과 현실 재현의 노력을 지적하였다(148). 반대 진영에서는 도비(Teresa Dovey)가 최초로 쿳시의 소설을 라깡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알레고리로 분석한 이후로,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쿳시의 관심을 증거로 들며 그를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주장하였다. 이 비평적 논란은 1994년-1995년에 웨이드(Jean-Philippe Wade)와 앳웰(David Attwell)간에 있었던 논전에서 새롭게 불붙게 되는데, 웨이드는 쿳시의 작품을 “공모적이며 정치적으로 무력한 자유주의 미학의 공간에서 서구식민담론의 끝없는 자기비판을 구동시킨,” “무력한 자의식을 다룬” 모더니즘계 소설로 평가절하하는 반면, 엣웰은 쿳시의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한다는 주장을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비정치적이라고 보는 시각 자체를 반박하게 된다(Wade 216; Attwell, “Naked Truth” 89). 이 후자의 진영에는 갤러허(Susan Gallagher), 후건(Graham Huggan) 그리고 왓슨(Stephen Watson)도 참여하는데, 이 중 후건과 왓슨은 자신들이 편집한 비평서의 서문에서 쿳시는 자유주의와 전통적 재현주의를 문제 삼는 포스트모더니스트임을 주장한다. 후건과 왓슨의 Introduction, Critical Perspectives on J. M. Coetzee, 6쪽을 볼 것. 이 비평가들보다 먼저 갤러허도 쿳시에 대한 단정적인 평가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그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한 바 있다. 갤러허의 A Story of South Africa: J. M. Coetzee's Fiction in Context, 44쪽 참조.
이러한 비평적 논란은 쿳시의 작품을 분류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은 문제임을 드러낸다. 사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간의 경계가 불분명하듯, 쿳시의 소설이 갖는 형식도 작품에 따라 각기 상이한 형태를 취할 뿐만 아니라 개개 작품이 다층적인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의 작품을 두고 단정적인 분류를 하기는 불가하다고 여겨진다.
본 논문에서는 ꡔ야만인들을 기다리며ꡕ(Waiting for the Barbarians, 1980)와 ꡔ철의 시대ꡕ(Age of Iron, 1990)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쿳시를 따라다니는 “공모적이고도 무력한 자유주의”라는 비판을 재고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쿳시의 문학이 남아공 비평계 일각에서 비난하는 공모적 자유주의와 변별되어야 하며, 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 지평을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비전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주의에 수렴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쿳시가 견지하는 공동체적 비전에 대한 논의는 ꡔ철의 시대ꡕ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먼저 남아공에서 자유주의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 보장을 지고의 선으로 삼는 개인주의적 이데올로기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남아공에서 자유주의는 특유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남아공의 정치적 상황은 아프리카너들로 구성된 백인지배계층과 흑인피지배계층으로 양극화되어 있으며, 이 두 진영 사이에는 인종적, 계급적으로는 지배계층에 속하나 심정적으로는 흑인의 편에 서는, 대체로 영국계를 중심으로 하는 영어권 주민들이 존재한다. 이 중간적 집단은 흑인들의 인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자유주의자로 불리게 된 이 집단이 제시한 ‘개혁’의 프로그램이 사실상 흑인들의 혁명적 기운을 봉쇄하는 목적으로 전용되거나, 혹은 흑인에 대한 억압을 보다 교묘하게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데에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줄기차게 주장하였고 남아공의 정부가 받아들인 개혁 프로그램이 갖는 문제점은 남아공에서 ‘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84년에 출간된 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되고 있다.

보싸 정권의 개혁정책은 정권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종차별제도의 해체도 아니며, 일부 정권 비판가들의 주장처럼 겉치레의 변혁도 아니다. 정부가 시도한 최근의 개혁은 대부분의 흑인을 반투스탄이라 불리는 농촌의 노동력 보류지에 묶어놓는 반면, 기술직 노동자들만을 교육시킴으로써 흑인 노동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였다. 또한 흑인 대중들을 극빈적인 상황에 버려 둔 반면, 흑인 사업가들과 산업노동자들에게만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부분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아프리카인 공동체 내에서 계급적 분열을 일으키고, 일반적인 정책결정에 있어서는 국가치안기구에 더 큰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치안기구를 강화할 것을 의도하였다.······ 비록 일부 흑인들이 최근의 개혁에서 득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대다수는 이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부의 의도이다. 선택된 소수의 흑인들에게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증대시키고 교육받은 흑인계층과 흑인대중을 이간질함으로써, 정부는 전자의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Danaher 246, 254-55)

개혁이 이처럼 체제옹호의 수단으로 이용되자 자유주의자들은 남아공의 흑인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 이러한 비판은 음팔레레의 글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맑시스트 비평가는 아프리카의 백인자유주의자를 “헌법적 수단에 의하여 정치적 불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백인”이라고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개진한다.

[백인자유주의자는] 자신이 제도권 내에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바로 그 타협을 이용하여 압제자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하며 합법적 제도 내에 자리를 잡는다. 합법적 정치권에서 개혁을 주창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그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그러나 남아공 자유주의자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정력의 삼분의 이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혁명을 피하여보려는 데에 사용하는 반면, 제도적 억압에 입으로만 저항하는 데에 나머지 정력 삼분의 일을 써버린다는 데에 있다. (67, 87)

이러한 맥락에서 남아공에서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고디머의 표현을 빌면, “더러운 말”이 되고 만다. 1974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그 자신 자유주의자라는 혐의(?)를 못 벗고 있는 고디머는 자유주의자를 “지킬 능력이 없는 약속을 남발하는 자”(Morphet par. 11 재인용)라고 규정한 바 있다.

to be continued at www.mfiction.or.kr 9권 2호 이석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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